포르투갈 사람들이 당시 중국해와 인도양 사이의 무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중계무역항이었던 말라카를 1511년 점령한 것이나, 스페인 사람들이 태평
양을 가로질러 1521년 필리핀에 상륙한 것은 모두 향료에 혈안이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17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영국과 네덜란드가 동인도 회사를 세우
고 아시아로 줄기차게 무역선단을 파송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책은 바로 이 향료를 둘러싸고 전개된 유럽인들의 모험과 싸움의 이야기
를 근사한 읽을거리로 선보이고 있다. 향료무역은 많은 비용과 희생이 따르는
사업이었다. 향료 구입에 필요한 자금 외에도 훌륭한 대포가 장착된 배와
능력 있고 경험 풍부한 선장과 선원들을 확보해야 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사이에 세 번에 걸쳐 동인도로 파견된 약 1천2백
명의 영국 선원들 가운데 무려 8백명이 항해 도중 괴혈병·장티푸스 등으로
죽었다.
풍랑과 암초를 만나 배가 침몰하기도 한다. 또 향료를 싣고 오던 배가 적대
관계에 있는 국가의 무장 범선을 만나 약탈당하고 심지어 잔인한 학살극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1601년 봄에 런던을 떠나 2년7개월 만에 귀항한
`레드 드래곤`호의 영국인 선장은 "길고 지루한 항해 동안 끝없는 재난과
위험 속에서도 무사히 집으로 인도해주신" 신에게 감사를 드린다. 배가 향료
를 가득 싣고 무사히 돌아오면 선장과 선원들은 고향의 항구에서 영웅이
됐고, 항해에 자금을 댄 상인들은 떼돈을 벌었다.
이 책의 원제는 `나다니엘의 육두구`(Nathaniel`s Nutmeg)로, 주로 육두구를
중심으로 벌어진 유럽인들의 경쟁을 그리고 있다. 향료는 물론 육두구 뿐만
아니라 후추와 정향, 육두구의 껍질인 메이스와 계피 등도 포함한다.
후추와 계피는 인도가 원산지이지만, 육두구와 정향은 역사적으로 향료제도
라고 불린 동부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제도다. 그 중 육두구가 많이 생산된
곳은 이 책의 후반부에서 중심무대가 되는 반다제도다.
육두구는 당시 유럽 사회에서 육류의 방부제와 음식의 조미료로 애용됐는데,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 런던의 한 외과의사가 흑사병에 육두구만이 유일
한 치료제라고 주장한 이후 사람들이 앞다퉈 찾는 물품이 됐다. 때문에 육
두구는 한때 금보다 더욱 비싸게 거래되기도 했다.
영국 출신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 가일스 밀턴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향료무역 진출 과정도 자세히 그리고 있다. 유럽인들 간의 치열한 경쟁,
유럽인들과 아시아 군주들간의 만남, 항해 중 선상에서의 삶과 죽음도
리얼하게 묘사돼 있다.
유럽인들은 향료제도에 진출해 요새를 건설하고 군사를 주둔시키며 섬의
추장을 회유 혹은 협박해 향료를 독점하기 위해 애쓴다.
향료제도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지배를 추구하는 그들의 모습 묘사는 당대
의 다양한 여행기들을 바탕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생생하다.
그러나 향료전쟁은 19세기 동아시아에서의 식민주의 시대에 재현되는데 이
책에선 제국주의의 시각에서 그들의 분투와 영웅담을 주로 다루고 피해자들
의 시각은 소홀하다는 태생적 한계가 엿보인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번역서에서 간혹 발견되는 그런 취약점을 가려 읽어내는 작업은 독자들의
몫인 셈이다.
2002년 11월 23일 중앙일보 기사에서 옮긴글입니다.
기고자 : 조흥국<동양사·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대우교수>
